트리엔트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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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리엔트 공의회는 1545년부터 1563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열린 가톨릭교회의 공의회이다. 교황 바오로 3세의 주도로 소집되어, 종교 개혁에 대응하여 가톨릭 교리를 재확인하고 교회 개혁을 목표로 했다. 주요 결정 사항으로는 성경 정경 확정, 칭의, 성사, 연옥, 성인 공경 등 가톨릭 교리의 재확인과 성직자 교육, 면죄부 판매 금지 등의 교회 개혁이 있다. 이 공의회는 가톨릭 교회의 방향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20세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가톨릭 교회의 표준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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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적 배경
마르틴 루터는 교황 레오 10세의 교황령 ''엑술르게 도미네(Exsurge Domine)''(1520년)에 대한 답으로 일반 공의회를 요구했다.[31] 1522년 독일 국회들이 이 요구에 동참했고, 카를 5세가 이를 지지하며 교회의 재통합과 종교 개혁 논쟁의 해결을 위한 수단으로 공의회를 압박했다. 그러나 클레멘스 7세(1523~1534년)는 프랑수아 1세와 의견을 같이하며 공의회 개최에 강력히 반대했다.
바오로 3세(1534~1549)는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이 몇몇 설교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특히 독일의 여러 제후들을 그 사상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알고 공의회를 소집하고자 했다. 그러나 추기경들에게 제안했을 때, 거의 만장일치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럽 전역에 사절을 파견하여 공의회 개최를 제안했다. 바오로 3세는 1537년 5월 23일 이탈리아 만토바에서 소집될 공의회에 대한 교령을 발표했다.[16] 마르틴 루터는 공의회를 대비하여 슈말칼덴 조항을 작성했는데, 이는 루터파가 어디까지 타협할 수 있고 어디까지 타협할 수 없는지를 명확히 정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프랑스와 카를 5세 사이에 또 다른 전쟁이 발발하여 프랑스의 고위 성직자들이 참석하지 못했고, 프로테스탄트들도 참석을 거부했다. 만토바의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교황은 1537년 가을에 공의회를 비첸차로 옮겼지만, 참가는 저조했다. 결국 공의회는 1539년 5월 21일 무기한 연기되었다.
그 후 바오로 3세는 여러 내부 교회 개혁을 시작한 반면, 카를 5세는 레겐스부르크 국회에서 프로테스탄트와 가스파로 콘타리니 추기경과 함께 회의를 열어 차이점을 조정하려 했다. 특정 주제에 대해 중재적이고 화해적인 공식이 개발되었으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대표자들 사이의 일치는 "교회와 칭의에 대한 개념의 차이" 때문에 실패했다.[18]
공의회는 1545년까지 지연되었고, 루터의 사망 직전에 소집되었다. 카를 5세의 압력을 거부할 수 없었던 교황은 1545년 12월 13일 트렌트(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공작-주교의 통치하에 있었다)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1547년 3월 전염병을 피한다는 구실로 볼로냐로 공의회를 옮기려던 교황의 결정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공의회는 1549년 9월 17일 무기한 연기되었다. 공의회 기간 동안 재위했던 세 명의 교황 중 어느 누구도 참석하지 않았는데, 이는 카를 5세의 조건이었다. 교황청을 대표하는 교황 특사들이 임명되었다.[19]
1551년 5월 1일 트렌트에서 율리우스 3세(1550~1555)의 소집으로 재개된 공의회는 1552년 4월 28일 작센 선제후 모리츠가 카를 5세 황제를 꺾고 인접국인 티롤로 진군하면서 중단되었다.[20] 극도의 반 프로테스탄트 성향을 가진 바오로 4세가 교황으로 재임하는 동안 공의회를 다시 소집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3]
제2기 동안, 참석한 프로테스탄트들은 이미 결정된 사항에 대한 재논의와 주교들의 교황에 대한 충성 맹세 해제를 요구했다. 마지막 회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프로테스탄트들과의 화해 의지는 완전히 사라졌고, 예수회가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3] 이 마지막 회기는 특히 프랑스 일각에서 요구되었던 프로테스탄트를 포함하는 공의회의 결성을 막기 위한 시도로 시작되었다.
비오 4세(1559–1565)에 의해 공의회는 마지막으로 1562년 1월 18일 트렌토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에서 재소집되어 1563년 12월 4일 최종적으로 폐회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폐회식은 재위 중인 교황, 공의회를 소집했던 교황들, 공의회를 지지했던 황제와 국왕들, 교황 특사들, 추기경들, 참석한 대사들, 주교들을 기리는 일련의 의례적인 환호로 마무리되었으며, 이어서 공의회의 신앙과 교령에 대한 수락의 환호와 모든 이단자들에 대한 파문 선언이 있었다.[21]
2. 1. 공의회 소집 이전의 상황

종교 개혁 운동의 주역인 마르틴 루터는 처음부터 새로운 교회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가톨릭교회 자체 개혁을 거듭 촉구했다. 그 과정에서 루터는 공의회 개최까지 요구했다. 그러나 15세기는 공의회주의와 교황 수위설의 격렬한 대립 시대였으며, 한때 공의회주의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던 시기도 있었다. 이 때문에 교황 측은 공의회 개최를 위험하게 여겨 지나치게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가톨릭교회 내부의 침체와 종교 개혁 운동의 고조 속에서 사태의 긴급성을 인식한 교황 바오로 3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협력 제안에 따라 공의회 개최를 결정했다.
1517년 3월 15일,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주교 선출, 세금, 검열, 설교 등에 대한 여러 개혁 제안을 내놓고 활동을 종료했지만, 독일과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교회가 직면한 새로운 주요 문제들에 대해서는 다루지 못했다. 몇 달 후인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에서 그의 ''95개조 논문''을 발표했다.
루터의 공의회에 대한 입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했지만,[7] 1520년 그는 독일 제후들에게 필요하다면 교황청의 개입 없이 자유롭고 공개적인 독일 내 공의회를 통해 당시 교황 교회에 반대할 것을 촉구했다.[8] 교황이 「만민에게 뜨겁게 외치다(Exsurge Domine)」에서 루터의 52개 논제를 이단으로 정죄한 후, 독일 여론은 기존의 차이점을 조정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공의회를 고려했다. 수가 줄어든 독일 가톨릭 신자들은 문제를 명확히 하기 위해 공의회를 바랐다.[9]
공의회가 실현되기까지 한 세대가 걸린 이유는 부분적으로 공의회주의를 통해 분열이 재연될 가능성에 대한 교황의 두려움, 루터교도들이 교황청의 공의회 배제를 요구한 점,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 간의 지속적인 정치적 경쟁, 지중해의 터키의 위협 등이었다.[10] 클레멘스 7세 (1523~1534년) 재위 시절, 가톨릭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 소속의 많은 루터교도들이 포함된 반란군들이 1527년 로마 약탈(1527년)을 감행하여 "강간, 살인, 방화, 절도 등은 반달족 이후로 전례가 없었다"고 한다. 성 베드로 대성당과 시스티나 예배당은 말을 위한 장소로 사용되었다.[11] 더 많은 폭력 가능성을 우려한 클레멘스 교황은 공의회 소집을 지연했다.[10]
카를 5세는 공의회를 강력히 지지했지만, 그를 군사적으로 공격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지지를 얻을 필요가 있었다.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내에서 신교의 일부 지지 때문에 일반 공의회에 반대했다. 중부 유럽의 광대한 영토를 통치한 카를의 동생 페르디난트 1세는 1532년 신교도들에게 종교적 자유를 부여한 뉘른베르크 종교 평화에 동의했고, 1533년에는 유럽의 가톨릭과 신교 지도자 모두를 포함하는 일반 공의회를 제안하여 두 신학 체계 간의 타협을 모색함으로써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 제안은 신교도들을 인정했고, 교회 문제에서 유럽의 세속 제후들을 성직자 위에 놓았기 때문에 교황의 반대에 부딪혔다. 터키의 공격에 직면한 카를은 신교 독일 통치자들의 지지를 받았는데, 그들은 모두 트렌토 공의회의 개회를 연기했다.[12]
처음에는 이탈리아의 만토바를 개최지로 선택했지만, 프랑스의 반대로 무산되었기에, 신성 로마 제국 영토의 자유 도시 트리엔트(Trento)를 다시 개최지로 정했다.
2. 2. 공의회 소집 과정
마르틴 루터는 교황 레오 10세의 교황령 ''엑술르게 도미네(Exsurge Domine)''(1520년)에 대한 답으로 일반 공의회를 요구했다.[31] 1522년 독일 국회들이 이 요구에 동참했고, 카를 5세가 이를 지지하며 교회의 재통합과 종교 개혁 논쟁의 해결을 위한 수단으로 공의회를 압박했다. 클레멘스 7세(1523~1534년)는 프랑수아 1세와 의견을 같이하며 공의회의 개최에 강력히 반대했다.바오로 3세(1534~1549)는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이 몇몇 설교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특히 독일의 여러 제후들을 그 사상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알고 공의회를 소집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생각을 추기경들에게 제안했을 때, 거의 만장일치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럽 전역에 사절을 파견하여 그러한 생각을 제안했다. 바오로 3세는 1537년 5월 23일 이탈리아 만토바에서 소집될 공의회에 대한 교령을 발표했다.[16] 마르틴 루터는 공의회를 대비하여 슈말칼덴 조항을 작성했다. 슈말칼덴 조항은 루터파가 어디까지 타협할 수 있고 어디까지 타협할 수 없는지를 명확히 정의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황제와 바오로 3세는 1537년 5월 23일 만토바에서 공의회를 소집하도록 명령했다.
프랑스와 카를 5세 사이에 또 다른 전쟁이 발발하여 프랑스의 고위 성직자들이 참석하지 못함에 따라 공의회는 소집되지 못했다. 프로테스탄트들도 참석을 거부했다. 만토바의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교황은 1537년 가을에 공의회를 비첸차로 옮겼지만, 참가는 저조했다. 공의회는 1539년 5월 21일 무기한 연기되었다.
그 후 바오로 3세는 여러 내부 교회 개혁을 시작한 반면, 카를 5세는 레겐스부르크 국회에서 프로테스탄트와 가스파로 콘타리니 추기경과 함께 회의를 열어 차이점을 조정하려 했다. 특정 주제에 대해 중재적이고 화해적인 공식이 개발되었다. 특히, 나중에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기각될 "칭의"의 이원적 교리가 공식화되었다.[17]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대표자들 사이의 일치는 "교회와 칭의에 대한 개념의 차이" 때문에 실패했다.[18]
그러나 공의회는 1545년까지 지연되었고, 마침 루터의 사망 직전에 소집되었다. 그러나 카를 5세의 압력을 거부할 수 없었던 교황은 만토바를 회의 장소로 제안한 후, 1545년 12월 13일 트렌트(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공작-주교의 통치하에 있었다)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1547년 3월 전염병을 피한다는 구실로 볼로냐로 공의회를 옮기려던 교황의 결정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공의회는 1549년 9월 17일 무기한 연기되었다. 공의회 기간 동안 재위했던 세 명의 교황 중 어느 누구도 참석하지 않았는데, 이는 카를 5세의 조건이었다. 교황청을 대표하는 교황 특사들이 임명되었다.[19]
1551년 5월 1일 트렌트에서 율리우스 3세(1550~1555)의 소집으로 재개된 공의회는 1552년 4월 28일 작센 선제후 모리츠가 카를 5세 황제를 꺾고 인접국인 티롤로 진군하면서 중단되었다.[20] 극도의 반 프로테스탄트 성향을 가진 바오로 4세가 교황으로 재임하는 동안 공의회를 다시 소집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3]
제2기 동안, 참석한 프로테스탄트들은 이미 결정된 사항에 대한 재논의와 주교들의 교황에 대한 충성 맹세 해제를 요구했다. 마지막 회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프로테스탄트들과의 화해 의지는 완전히 사라졌고, 예수회가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3] 이 마지막 회기는 특히 프랑스 일각에서 요구되었던 프로테스탄트를 포함하는 공의회의 결성을 막기 위한 시도로 시작되었다.
비오 4세(1559–1565)에 의해 공의회는 마지막으로 1562년 1월 18일 트렌토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에서 재소집되어 1563년 12월 4일 최종적으로 폐회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폐회식은 재위 중인 교황, 공의회를 소집했던 교황들, 공의회를 지지했던 황제와 국왕들, 교황 특사들, 추기경들, 참석한 대사들, 주교들을 기리는 일련의 의례적인 환호로 마무리되었으며, 이어서 공의회의 신앙과 교령에 대한 수락의 환호와 모든 이단자들에 대한 파문 선언이 있었다.[21]
종교 개혁 운동의 주역인 마르틴 루터는 가톨릭교회의 자체 개혁을 거듭 촉구하며 공의회 개최를 요구했다. 그러나 15세기는 공의회주의와 교황 수위설의 격렬한 대립 시대였으며, 한때 공의회주의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던 시기도 있었다. 이 때문에 교황 측은 공의회를 위험시 여겨 개최에 대해 지나치게 신중했다.
가톨릭교회 내부의 침체와 종교 개혁 운동의 고조 속에서, 사태의 긴급성을 인식한 교황 바오로 3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협력 제안도 있었기에 공의회 개최를 결정했다. 처음에는 이탈리아의 만토바를 개최지로 선택했지만, 프랑스의 반대로 무산되었기에, 신성 로마 제국 영토의 자유 도시 트리엔트(Trento)를 다시 개최지로 정했다.
3. 공의회의 진행 과정
트리엔트 공의회는 1545년부터 1563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마르틴 루터는 레오 10세의 교황령 ''엑술르게 도미네(Exsurge Domine)''(1520년)에 대한 답으로 공의회를 요구했고, 1522년 독일 국회가 이에 동참했다. 카를 5세는 종교 개혁 논쟁을 해결하고 교회를 재통합하기 위해 공의회를 추진했으나, 클레멘스 7세는 프랑수아 1세와 함께 공의회 개최에 반대했다.[31]
공의회는 초기에는 약 30명의 주교만 참석하는 등 소규모로 시작했으나,[14] 회기가 끝날 무렵에는 증가했다. 니케아 공의회 제1차 회의(318명 참석)[31]나 제1차 바티칸 공의회(744명 참석)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1563년에는 255명의 회원이 교령에 서명하여 공의회 전체 회기 중 가장 많은 참석자를 기록했다. 여기에는 교황 특사 4명, 추기경 2명, 총대주교 3명, 대주교 25명, 주교 168명이 포함되었으며, 이 중 3분의 2는 이탈리아인이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고위 성직자들이 수적으로나 권력 면에서 우세했다. 가장 중요한 교령이 통과될 때는 60명이 채 되지 않는 고위 성직자만이 참석했다.[31]
1545년 3월 15일 공의회가 시작되어 1547년까지 제1회기가 진행되었다. 슈말칼덴 전쟁으로 인해 볼로냐로 장소를 옮겼다가 전염병 유행으로 중단되었다. 1551년 교황 율리오 3세에 의해 제2회기가 시작되었으나, 1552년 루터교 신자인 작센 선제후 모리츠가 카를 5세에게 승리하면서 공의회 안전이 위협받아 중단되었다. 1562년 교황 비오 4세의 노력으로 제3회기가 시작되어 조반니 모로네 추기경 주도하에 가톨릭 교회 개혁, 성사(秘跡), 성전(聖傳)을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되었고, 1563년에 거의 모든 의제를 논의하고 종료되었다.
3. 1. 제1회기 (1545-1547)
마르틴 루터의 공의회에 대한 입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했지만,[7] 1520년 그는 독일 제후들에게 필요하다면 교황청의 개입 없이 자유롭고 공개적인 독일 내 공의회를 통해 당시 교황 교회에 반대할 것을 촉구했다.[8] 클레멘스 7세 (1523~1534년) 재위 시절, 가톨릭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 소속의 많은 루터교도들이 포함된 반란군들이 1527년 로마 약탈(1527년)을 감행하여 "강간, 살인, 방화, 절도 등은 반달족 이후로 전례가 없었다"고 한다. 성 베드로 대성당과 시스티나 예배당은 말을 위한 장소로 사용되었다.[11] 더 많은 폭력 가능성을 우려한 클레멘스 교황은 공의회 소집을 지연했다.[10]카를 5세는 공의회를 강력히 지지했지만, 그를 군사적으로 공격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지지를 얻을 필요가 있었다.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내에서 신교의 일부 지지 때문에 일반 공의회에 반대했다. 중부 유럽의 광대한 영토를 통치한 카를의 동생 페르디난트 1세는 1532년 신교도들에게 종교적 자유를 부여한 뉘른베르크 종교 평화에 동의했고, 1533년에는 유럽의 가톨릭과 신교 지도자 모두를 포함하는 일반 공의회를 제안하여 두 신학 체계 간의 타협을 모색함으로써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 제안은 신교도들을 인정했고, 교회 문제에서 유럽의 세속 제후들을 성직자 위에 놓았기 때문에 교황의 반대에 부딪혔다. 터키의 공격에 직면한 카를은 신교 독일 통치자들의 지지를 받았는데, 그들은 모두 트리엔트 공의회의 개회를 연기했다.[12]
파울루스 3세 (1534~1549)는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이 몇몇 설교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특히 독일의 여러 제후들을 그 사상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알고 공의회를 소집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생각을 추기경들에게 제안했을 때, 거의 만장일치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럽 전역에 사절을 파견하여 그러한 생각을 제안했다. 파울루스 3세는 1537년 5월 23일 이탈리아 만토바에서 소집될 공의회에 대한 교령을 발표했다.[16] 마르틴 루터는 공의회를 대비하여 슈말칼덴 조항을 작성했다. 슈말칼덴 조항은 루터파가 어디까지 타협할 수 있고 어디까지 타협할 수 없는지를 명확히 정의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황제와 파울루스 3세 교황은 1537년 5월 23일 만토바에서 공의회를 소집하도록 명령했다.
프랑스와 카를 5세 사이에 또 다른 전쟁이 발발하여 프랑스의 고위 성직자들이 참석하지 못함에 따라 공의회는 소집되지 못했다. 프로테스탄트들도 참석을 거부했다. 만토바의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교황은 1537년 가을에 공의회를 비첸차로 옮겼지만, 참가는 저조했다. 공의회는 1539년 5월 21일 무기한 연기되었다.
그 후 파울루스 3세는 여러 내부 교회 개혁을 시작한 반면, 카를 5세 황제는 레겐스부르크 국회에서 프로테스탄트와 가스파로 콘타리니 추기경과 함께 회의를 열어 차이점을 조정하려 했다. 특정 주제에 대해 중재적이고 화해적인 공식이 개발되었다. 특히, 나중에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기각될 "칭의"의 이원적 교리가 공식화되었다.[17]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대표자들 사이의 일치는 "교회와 칭의에 대한 개념의 차이" 때문에 실패했다.[18]
그러나 공의회는 1545년까지 지연되었고, 마침 루터의 사망 직전에 소집되었다. 그러나 카를 5세의 압력을 거부할 수 없었던 교황은 만투아를 회의 장소로 제안한 후, 1545년 12월 13일 트리엔트(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공작-주교의 통치하에 있었다)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1547년 3월 전염병을 피한다는 구실로 볼로냐로 공의회를 옮기려던 교황의 결정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공의회는 1549년 9월 17일 무기한 연기되었다. 공의회 기간 동안 재위했던 세 명의 교황 중 어느 누구도 참석하지 않았는데, 이는 카를 5세의 조건이었다. 교황청을 대표하는 교황 특사들이 임명되었다.[19]
1545년 3월 15일에 공의회가 시작되었다. 1547년까지 이어진 제1회기는 슈말칼덴 전쟁이 격화됨에 따라 개최지를 일시적으로 볼로냐로 옮겼고, 이후 전염병의 유행으로 중단되었다.
3. 2. 제2회기 (1551-1552)
1551년 5월 1일, 율리우스 3세(1550~1555) 교황의 소집으로 트리엔트에서 공의회가 재개되었다.[20] 그러나 1552년 4월 28일, 작센 선제후 모리츠가 카를 5세 황제를 꺾고 인접국인 티롤로 진군하면서 공의회는 중단되었다.[20] 극도로 반(反) 프로테스탄트 성향을 가진 파울루스 4세가 교황으로 재임하는 동안에는 공의회를 다시 소집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3]제2기 동안, 참석한 프로테스탄트들은 이미 결정된 사항에 대한 재논의와 주교들의 교황에 대한 충성 맹세 해제를 요구했다. 마지막 회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프로테스탄트들과의 화해 의지는 완전히 사라졌고, 예수회가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3]
3. 3. 제3회기 (1562-1563)
1562년 교황 비오 4세(PIVS IVla)의 노력으로 10년간 중단되었던 제3회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 회기에서는 조반니 모로네 추기경의 주도하에 가톨릭 교회의 개혁, 성사(秘跡) 및 성전(聖傳)을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되었으며, 1563년에 예정된 거의 모든 의제를 논의하고 공의회가 종료되었다.참가자 수는 회기에 따라 변동되었지만, 최종적으로 공의회 문서에 서명한 사람은 255명이었다. 구체적인 내역은 다음과 같다.
구분 | 교황 사절 | 추기경 | 총대주교 | 대주교 | 주교 | 합계 |
---|---|---|---|---|---|---|
인원 | 4명 | 2명 | 3명 | 25명 | 168명 | 255명 |
전체 서명자 중 3분의 2는 이탈리아 출신이었다. 스페인에서는 칼라만카 학파의 신학자 프란시스코 데 비토리아, 도밍고 데 소토, 메르콜 카노 등이 대표단으로 선출되었으나, 비토리아는 질병으로 인해 사퇴하였다. 이들은 이론적인 측면에서 가톨릭 세력 재건에 큰 기여를 하였다.
4. 주요 의제 및 결정 사항
트리엔트 공의회는 프로테스탄티즘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가르침을 명확히 하였다.[49] 주요 의제는 크게 두 가지로, 프로테스탄티즘의 주장을 반박하고 가톨릭 교리를 재확인하는 것과 교회 내부의 개혁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공의회는 성경과 더불어 성전, 원죄, 의화, 성사 등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었다.[49] 불가타 성경을 공식 표준판 성경으로 정하고, 트리덴틴 신앙 고백을 발표하였다. 후임 교황 비오 5세는 로마 교리서, 성무일도서, 로마 미사 경본 개정판을 반포하여 트리덴틴 미사를 400년간 교회의 대표적인 미사 양식으로 만들었다.
공의회는 면죄부 판매, 수도원의 도덕성, 성직자 교육, 주교의 거주지 이탈 등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 결투를 금지했다.[31] 특히 성직자의 세속화를 방지하기 위해 주교의 정주와 독신주의를 엄격하게 시행하고, 사제 양성 기관을 충실하게 운영하도록 결정했다.
다음은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다룬 교리와 관련된 표이다.
교리 | 회기 | 날짜 | 법규 | 교령 |
---|---|---|---|---|
성경 | 4 | 1546년 4월 8일 | 없음 | 1 |
원죄 | 5 | 1546년 6월 7일 | 5 | 4 |
의화 | 6 | 1547년 1월 13일 | 33 | 16 |
성사 | 7 | 1547년 3월 3일 | 13 | 1 |
세례성사 | 7 | 1547년 3월 3일 | 14 | 없음 |
견진성사 | 7 | 1547년 3월 4일 | 3 | 없음 |
성체성사 | 13 | 1551년 10월 11일 | 11 | 8 |
고해성사 | 14 | 1551년 11월 15일 | 15 | 15 |
종부성사 | 14 | 1551년 11월 4일 | 4 | 3 |
혼인성사 | 24 | 1563년 11월 11일 | 12 | 10 |
성인과 성인 유해 및 성화상 공경 | 25 | 1563년 12월 4일 | 없음 | 3 |
대사 | 25 | 1563년 12월 4일 | 없음 | 1 |
공의회는 금서 목록 작성을 위한 위원회를 임명했지만(제18회기), 최종 결정은 교황에게 맡겼다. 교리서 준비와 브레비아리, 미사 경본 개정도 교황에게 위임되었다.[31]
4. 1. 가톨릭 교리 재확인
니케아 신경(제3회기)이 재확인되었고, 공의회 결정(제4회기)을 통해 외경이 다른 정경의 책들과 동등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루터가 이 책들을 그의 성경판에서 외경으로 분류한 것에 반대). 또한 교회 전통을 성경과 함께 신앙의 규칙으로 삼았다. 불가타 번역본은 성경 본문에 대한 권위 있는 번역본으로 확인되었다.[31]칭의(제6회기)는 신적 은총에 대한 인간의 협력을 바탕으로 주어진다고 선언되었다.[31](시너지즘) 이는 전형적인 프로테스탄트 교리인 은총의 수동적 수용(모너지즘)과 대조된다. 공의회는 프로테스탄트의 "오직 믿음으로" 교리를 단순한 인간의 하느님 자비에 대한 신뢰로 이해하면서, 프로테스탄트의 "헛된 신뢰"를 배격하고, 특별한 계시를 받지 않고서는 누가 최종적인 인내의 은총을 받았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고 명시했다. 더 나아가 공의회는 일부 프로테스탄트들과 달리, 하느님의 은총은 대죄를 통해 상실될 수 있다고 확언했다.
공의회 결정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성사이다. 일곱 가지 성사가 재확인되었고, 성찬은 진정한 속죄 제사이자 성사로 선포되었는데, 이 성사에서 빵과 포도주는 성별되어 성찬이 된다(제13회기와 제22회기). 공의회에서 화체설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스콜라 철학에서 제시된 특정 아리스토텔레스적 설명은 교리로서 인용되지 않았다. 대신 결정문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성별된 형태로 "진정으로, 참으로, 실체적으로 현존하신다"고 명시하고 있다. 미사의 제사는 죽은 자와 산 자 모두를 위해 드려져야 하며,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명령을 사도들에게 내림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사제적 권능을 부여하셨다. 평신도에게 성찬의 잔을 주지 않는 관행(제21회기)은 교부들이 훌륭하고 충분한 이유로 명령했던 것으로 확인되었지만, 특정한 경우에는 교황이 그 규칙을 엄격하게 유지해야 하는지 여부에 대한 최고의 결정권자로 정해졌다.[31]
성품 성사(제23회기)는 영혼에 지울 수 없는 성격을 새긴다고 정의되었다. 신약의 사제직은 레위 사제직을 대신한다. 그 직무를 수행하는 데에는 백성의 동의가 필요하지 않다.[31]
결혼에 관한 결정(제24회기)에서는 독신 생활 상태의 우수성을 재확인하고, 사실혼을 규탄했으며, 결혼의 유효성을 사제와 두 명의 증인 앞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에 의존하도록 했지만, 부모의 동의 요구 사항이 없어짐으로써 12세기부터 이어져 온 논쟁이 끝났다. 이혼의 경우, 다른 배우자가 살아있는 한 무죄한 배우자의 재혼 권리는 인정되지 않았다.[31] 다른 배우자가 간음을 저질렀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공의회는 "…성직자 독신의 필요성이나 유용성을 주장하는 것을 거부했다"고 밝혔다.
제25회이자 마지막 회기[25]에서는 연옥, 성인의 호칭, 유물의 숭배에 대한 교리가 재확인되었고, 교회에 주어진 권능에 따라 교회가 분배하는 사면의 효능도 재확인되었지만, 일부 주의 사항[31]과 사면 판매 금지가 함께 포함되었다. 종교 이미지에 관한 짧고 다소 애매한 구절은 막대한 영향을 미쳐 가톨릭 미술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제2차 니케아 공의회(787년)보다 훨씬 더 트렌토 공의회 교부들은 그리스도교 이미지의 교육적 목적을 강조했다.[26]
교리 | 회기 | 날짜 | 법규 | 교령 |
---|---|---|---|---|
성경 | 4 | 1546년 4월 8일 | 없음 | 1 |
원죄 | 5 | 1546년 6월 7일 | 5 | 4 |
의화 | 6 | 1547년 1월 13일 | 33 | 16 |
성사 | 7 | 1547년 3월 3일 | 13 | 1 |
세례성사 | 7 | 1547년 3월 3일 | 14 | 없음 |
견진성사 | 7 | 1547년 3월 4일 | 3 | 없음 |
성체성사 | 13 | 1551년 10월 11일 | 11 | 8 |
고해성사 | 14 | 1551년 11월 15일 | 15 | 15 |
종부성사 | 14 | 1551년 11월 4일 | 4 | 3 |
혼인성사 | 24 | 1563년 11월 11일 | 12 | 10 |
성인과 성인 유해 및 성화상 공경 | 25 | 1563년 12월 4일 | 없음 | 3 |
대사 | 25 | 1563년 12월 4일 | 없음 | 1 |
4. 2. 교회 개혁
트리엔트 공의회는 프로테스탄티즘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가르침을 명확히 하였다.[49] 성경과 더불어 성전, 원죄, 의화, 성사 등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었다.[49]공의회는 불가타 성경을 공식 표준판 성경으로 정하고, 트리덴틴 신앙 고백을 발표하였다. 후임 교황 비오 5세는 로마 교리서, 성무일도서, 로마 미사 경본 개정판을 반포하여 트리덴틴 미사를 400년간 교회의 대표적인 미사 양식으로 만들었다.
공의회는 다음과 같은 주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1. 프로테스탄티즘의 원리와 교리를 단죄하고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명확히 하는 것.[31]
2. 규율 또는 행정에서 개혁을 실시하는 것.[31]
공의회는 면죄부 판매, 수도원의 도덕성, 성직자 교육, 주교의 거주지 이탈 등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 결투를 금지했다.[31]
논의된 구체적인 문제는 다음과 같다.
공의회는 니케아 신경을 재확인하고, 외경이 정경과 동등하다고 확인했다.[31] 칭의는 신적 은총에 대한 인간의 협력을 바탕으로 주어진다고 선언했다.[31]
성사에 대해서는 일곱 가지 성사가 재확인되었고, 성찬은 진정한 속죄 제사이자 성사로 선포되었다.[31] 화체설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그리스도께서 성별된 형태로 "진정으로, 참으로, 실체적으로 현존하신다"고 명시했다.[31]
성품 성사는 영혼에 지울 수 없는 성격을 새긴다고 정의되었다.[31] 결혼에 관한 결정에서는 독신 생활 상태의 우수성을 재확인하고, 사실혼을 규탄했다.[31]
연옥, 성인의 호칭, 유물의 숭배에 대한 교리가 재확인되었고, 사면의 효능도 재확인되었지만, 사면 판매는 금지되었다.[31]
다음은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다룬 교리와 관련된 표이다.
교리 | 회기 | 날짜 | 법규 | 교령 |
---|---|---|---|---|
성경 | 4 | 1546년 4월 8일 | 없음 | 1 |
원죄 | 5 | 1546년 6월 7일 | 5 | 4 |
의화 | 6 | 1547년 1월 13일 | 33 | 16 |
성사 | 7 | 1547년 3월 3일 | 13 | 1 |
세례성사 | 7 | 1547년 3월 3일 | 14 | 없음 |
견진성사 | 7 | 1547년 3월 4일 | 3 | 없음 |
성체성사 | 13 | 1551년 10월 11일 | 11 | 8 |
고해성사 | 14 | 1551년 11월 15일 | 15 | 15 |
종부성사 | 14 | 1551년 11월 4일 | 4 | 3 |
혼인성사 | 24 | 1563년 11월 11일 | 12 | 10 |
성인과 성인 유해 및 성화상 공경 | 25 | 1563년 12월 4일 | 없음 | 3 |
대사 | 25 | 1563년 12월 4일 | 없음 | 1 |
4. 3. 기타 결정 사항
트리엔트 공의회는 가톨릭 교회의 전례와 관행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공의회는 라틴어 불가타 성경을 로마 교회의 공식 성경으로 지정하고, 전통적인 가톨릭 성경 정경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이는 프로테스탄트의 외경 배제에 대한 반응이었다.[3] 1565년, 교황 비오 4세는 트리엔트 신경을 발표했고, 그의 후계자 비오 5세는 로마 교리서, 브레비아리, 미사서 개정판을 발표하여 트리엔트 미사를 성문화했다.공의회는 다음과 같은 교리적 결정을 내렸다.
- 니케아 신경 재확인 (제3회기)
- 외경이 정경의 책들과 동등함을 확인 (제4회기)
- 불가타 번역본을 성경 본문의 권위 있는 번역본으로 확인[31]
- 칭의는 신적 은총에 대한 인간의 협력을 바탕으로 주어진다고 선언 (시너지즘)[31]
- 성사는 일곱 가지가 있다고 재확인, 성찬은 진정한 속죄 제사이자 성사로 선포[31]
- 화체설 용어 사용, 그리스도께서 성별된 형태로 "진정으로, 참으로, 실체적으로 현존하신다"고 명시[31]
- 성품 성사는 영혼에 지울 수 없는 성격을 새긴다고 정의[31]
- 혼인성사에서 독신 생활 상태의 우수성 재확인, 사실혼 규탄, 결혼 유효성은 사제와 두 명의 증인 앞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에 의존[31]
- 연옥, 성인의 호칭, 유물의 숭배에 대한 교리 재확인 (제25회기)[25]
공의회는 금서 목록 작성을 위한 위원회를 임명했지만(제18회기), 최종 결정은 교황에게 맡겼다. 교리서 준비와 브레비아리, 미사 경본 개정도 교황에게 위임되었다.[31] 교리서는 성사, 성경, 교회 교리, 성직자의 의무 등 공의회의 광범위한 결과를 구체화했다.[5]
공의회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재확인했으며, 루터가 성경에서 제외했던 구약성경이 정경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또한 성경과 성전이 가르침의 근거이며, 불가타역이 가톨릭교회의 유일한 공식 성경임을 결의했다.
칭의 문제에 대해서는 은총이 칭의의 근본임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자유 의지에 의한 협력에도 의미를 인정했다. 프로테스탄트와 견해가 다른 일곱 성사에 대해서도 성경적 근거를 주장하며 유효함을 인정했다. 특히 성체 성사의 중요성을 주장하고, 성변화에 의해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됨을 (화체설) 확인했다. 고해성사, 성품성사, 혼인성사 등에 대해서도 재검토하여 명확한 형태를 제시했다.
교회 개혁과 관련하여 주교의 정주와 독신주의를 엄격하게 시행하고, 사제 양성 기관을 충실하게 운영하여 성직자의 세속화를 방지하기 위한 대책을 결정했다. 면죄부 판매와 금전적 거래를 금지하면서도 "면죄"의 의미는 유지하고, 성인과 성유물의 숭배, 연옥과 여러 성인의 공로 등 교회의 전통에 유래하는 교리가 여전히 유효함을 인정했다.
5. 공의회 이후의 영향
트리엔트 공의회는 프로테스탄티즘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공식적으로 규탄했으며, 이에 대응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가르침에 대한 주요 성명을 발표했다.[49] 공의회는 성경, 성경의 경전, 성전, 원죄, 의화, 구원, 성사, 미사, 성인 공경 등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었다.[49]
트렌토 공의회의 결과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례와 생활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공의회는 대중 라틴어 성경인 불가타 성경을 따라 오늘날과 같은 정경 목록을 재확인하고 불가타 공식 표준판 성경을 펴내기 위한 위원회를 출범시켰다.[44]
공의회는 모든 교령과 정의에 대해 교황의 비준을 요청했고, 비오 4세는 교황령 ''베네딕투스 데우스''를 통해 모든 가톨릭 신자들에게 엄격한 복종을 명하고, 파문의 위험 하에 모든 무단 해석을 금하며, 이 권한을 교황에게만 남겨두었다. 또한 불복종하는 이들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의 복되신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진노"를 경고했다. 비오 4세는 교령의 해석과 집행을 돕기 위해 추기경 위원회를 임명했다.[31]
이 교령들은 1566년 아우크스부르크 국회에서 이탈리아, 포르투갈, 폴란드, 그리고 독일의 가톨릭 공후들에 의해 승인되었다. 필리프 2세는 왕권을 침해하지 않는 한 스페인, 네덜란드, 시칠리아에 대해 이를 수용했다. 프랑스에서는 교리적 부분에 대해서만 국왕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징계적 또는 도덕적 개혁 교령은 왕좌에 의해 발표된 적이 없었지만, 지방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고 주교들에 의해 집행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와 막시밀리안 2세는 어떤 교령도 인정하지 않았다.[30] 영국에서는 도입 시도가 전혀 없었다. 메리 스튜어트는 존 녹스와 종교 개혁 앞에서 교령 발표를 할 수 없었다.[31]
이 교령들은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보충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의 방향성에 큰 영향을 준 중요한 회의였다. 다음 공의회는 300년 이상 지난 후인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열렸다.
트리엔트 공의회에 대한 비판으로, 1546년부터 1564년 사이에 출판된 책 87권 중 41권은 전 교황 사절에서 개신교 개혁가로 변신한 피에르 파올로 베르제리오(Pier Paolo Vergerio)가 저술했다.[32] 마르틴 켐니츠(Martin Chemnitz)의 ''트렌트 공의회 교령 검토(Examen decretorum Concilii Tridentini)''[33] (''트렌트 공의회 검토(Examination of the Council of Trent)'')는 트리엔트 공의회에 대한 주요 루터교의 반응이었다.[34] 이 책은 디오고 데 파이바 데 안드라다(Diogo de Payva de Andrada)가 켐니츠를 공격하기 위해 쓴 논쟁적인 글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되었다.[35]
이에 대한 답변으로 안드라다는 1578년에 5부로 구성된 ''
5. 1. 가톨릭 교회에 미친 영향
회의가 끝나자 공의회는 교황에게 모든 교령과 정의를 비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청원은 1564년 1월 26일 비오 4세가 교황령 ''베네딕투스 데우스''에서 모든 가톨릭 신자들에게 엄격한 복종을 명하고, 파문의 위험 하에 모든 무단 해석을 금하며, 이 권한을 교황에게만 남겨두고, 불복종자들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의 복되신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진노"를 경고함으로써 응답되었다. 비오 4세는 교령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것을 돕기 위해 추기경 위원회를 임명했다.[31]1564년에 ''금서 목록''이 발표되었고,[31] 회기 중 특별위원회 설치를 통한 금서 목록 제정도 의도되었으나, 교황의 판단에 일임되었다. 교황의 출판 허가를 받아 트리엔트 신앙 고백과 트리엔트 교리서(1566), 브레비아리(1568), 미사서(1570), 불가타(1590년과 1592년)가 발행되었다.[31] 또한, 교리서, 성무일과, 미사 전례서 및 불가타역 성경의 개정도 교황의 판단에 맡겨졌는데, 이들은 나중에 실행되어 20세기까지 가톨릭 교회의 표준이 되었다.
이 교령들은 1566년 아우크스부르크 국회에서 이탈리아, 포르투갈, 폴란드, 그리고 독일의 가톨릭 공후들에 의해 승인되었다. 필리프 2세는 왕권을 침해하지 않는 한 스페인, 네덜란드, 시칠리아에 대해 이를 수용했다. 프랑스에서는 교리적 부분에 대해서만 국왕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징계적 또는 도덕적 개혁 교령은 왕좌에 의해 발표된 적이 없었지만, 지방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고 주교들에 의해 집행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와 막시밀리안 2세는 어떤 교령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았다.[30] 영국에서는 도입 시도가 전혀 없었다. 비오 4세는 1564년 6월 13일자 편지와 함께 메리 스튜어트에게 교령을 보내 스코틀랜드에서 이를 발표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그녀는 존 녹스와 종교 개혁 앞에서 감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31]
폐회에 있어서 공의회는 모든 교령에 대한 교황의 승인을 요청하였고, 교황은 이를 인정하여 전 세계 교회에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선포하였다. 교황은 또한 결의 사항의 원활한 실현을 위한 추기경 위원회를 임명하였다. 그들은 공의회 문서를 라틴어로 출판하고, 주교단을 통해 유럽 각국에 공의회 문서를 배포하고, 각국어로 번역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자신의 교리를 재확인하고 가톨릭 교회에서 모든 더러움을 씻어내고자 했던 중요한 회의였으며, 20세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의 방향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다음 공의회가 열리는 것은 무려 300년 이상이 지난 후인 제1차 바티칸 공의회였다.
5. 2. 대한민국 천주교회에 미친 영향
트리엔트 공의회는 1545년부터 1563년까지 열렸는데, 이 시기는 아직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되기 전이므로 대한민국 천주교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5. 3. 세계 역사에 미친 영향
트리엔트 공의회는 프로테스탄티즘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공식적으로 규탄했으며, 이에 대응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가르침에 대한 주요 성명을 발표했다.[49] 공의회는 성경, 성경의 경전, 성전, 원죄, 의화, 구원, 성사, 미사, 성인 공경 등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었다.[49]트렌토 공의회의 결과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례와 생활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공의회는 대중 라틴어 성경인 불가타 성경을 따라 오늘날과 같은 정경 목록을 재확인하고 불가타 공식 표준판 성경을 펴내기 위한 위원회를 출범시켰다.[44] 공의회가 끝난 후, 교황 비오 4세는 트리덴틴 신앙 고백을 발간하였으며, 그의 후임자 비오 5세는 로마 교리서(1566년), 성무일도서 개정판(1568년), 로마 미사 경본 개정판(1570년)을 잇달아 반포하였다. 이를 통해 트리덴틴 미사가 성문화되어 이후 400년 동안 교회의 대표적인 미사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공의회는 모든 교령과 정의에 대해 교황의 비준을 요청했고, 비오 4세는 교황령 ''베네딕투스 데우스''를 통해 모든 가톨릭 신자들에게 엄격한 복종을 명하고, 파문의 위험 하에 모든 무단 해석을 금하며, 이 권한을 교황에게만 남겨두었다. 또한 불복종하는 이들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의 복되신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진노"를 경고했다. 비오 4세는 교령의 해석과 집행을 돕기 위해 추기경 위원회를 임명했다.[31]
1564년에는 ''금서 목록''이 발표되었고, 트리엔트 신앙 고백과 트리엔트 교리서(1566년), 브레비아리(1568년), 미사서(1570년), 불가타(1590년과 1592년)가 교황의 출판 허가를 받아 발행되었다.[31]
이 교령들은 1566년 아우크스부르크 국회에서 이탈리아, 포르투갈, 폴란드, 그리고 독일의 가톨릭 공후들에 의해 승인되었다. 필리프 2세는 왕권을 침해하지 않는 한 스페인, 네덜란드, 시칠리아에 대해 이를 수용했다. 프랑스에서는 교리적 부분에 대해서만 국왕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징계적 또는 도덕적 개혁 교령은 왕좌에 의해 발표된 적이 없었지만, 지방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고 주교들에 의해 집행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와 막시밀리안 2세는 어떤 교령도 인정하지 않았다.[30] 영국에서는 도입 시도가 전혀 없었다. 메리 스튜어트는 존 녹스와 종교 개혁 앞에서 교령 발표를 할 수 없었다.[31]
이 교령들은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보충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의 방향성에 큰 영향을 준 중요한 회의였다. 다음 공의회는 300년 이상 지난 후인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열렸다.
트리엔트 공의회에 대한 비판으로, 1546년부터 1564년 사이에 출판된 책 87권 중 41권은 전 교황 사절에서 개신교 개혁가로 변신한 피에르 파올로 베르제리오(Pier Paolo Vergerio)가 저술했다.[32] 마르틴 켐니츠(Martin Chemnitz)의 ''트렌트 공의회 교령 검토(Examen decretorum Concilii Tridentini)''[33] (''트렌트 공의회 검토(Examination of the Council of Trent)'')는 트리엔트 공의회에 대한 주요 루터교의 반응이었다.[34] 이 책은 디오고 데 파이바 데 안드라다(Diogo de Payva de Andrada)가 켐니츠를 공격하기 위해 쓴 논쟁적인 글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되었다.[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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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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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World History
Henry Holt and Company
1994
[50]
서적
Konciliengeschichte
Verlag Her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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